▲ 종이신문보기

여자의 촉은 바늘 끝보다 날카롭다. 남편 머플러에 붙어 있던 갈색 머리카락 한 올로 모든 비극의 시작을 꿰뚫으니 말이다. 분노로 흔들리는 마음을 그녀는 바늘을 닮은 스틸레토 힐에 싣는다. 불안감은 몸을 휘청거리게 한다.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다 보면 김희애의 발끝에 시선이 머문다. 불륜과 치정이 극적인 순간에 도달할수록 김희애는 구두로 도발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했다"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는 첫회에 초록색 트렌치코트에 이탈리아 고급 슈즈 브랜드인 '로저 비비에'의 구두를 신는다. 4.5㎝, 편안한 굽 높이다. 당당했던 발걸음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은 뒤 휘청댄다.

복수의 감정을 대변하는 건 힐이다. 호피로 된 로저 비비에의 높이 8.5㎝, 가는 굽에 카메라가 멈춘다.〈사진〉 "이 지옥 같은 고통을 어떻게 해야 돌려줄까. 남김없이, 공평히"라고 다짐하는 눈매는 날카로운 굽만큼 매섭다. 시청자들은 높아진 하이힐만큼이나 치솟는 혈압에 '저혈압 치료용 드라마'란 별칭도 붙였다. 패션을 심리 상태로 대치한 일종의 메타포다.

'송곳'이란 뜻의 스틸레토 힐을 포함한 하이힐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신(神)의 형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높은 굽에 올라탔다는 의미다. 저수 시설이 좋지 않던 과거에 오물을 피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현대적인 '스틸레토 힐'은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 로저 비비에(1907~1998)가 탄생시켰다. 가는 쇠를 넣어 굽을 만들고 굽 바닥을 조금 넓게 해 균형감을 살렸다. 뾰족한 힐에 의지하다 보니 신는 이들의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스틸레토 힐은 관능의 상징이기도 하다. '빨간 밑창' 하이힐을 유행시킨 유명 슈즈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루부탱은 "힐을 신고는 빨리 달리지 못하니 남자들이 그녀를 좀 더 오래 볼 수 있게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때 남성의 시선을 유혹하는 도구 취급을 받던 하이힐은 여성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대체어로도 여겨진다. 모든 걸 강도 맞아도 구두만은 포기 못 한다며 '구두 중독(shoeaholic)'이란 유행어를 낳은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나 "신는 순간 영혼을 판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이 대표적이다. 기고자 : 최보윤 기자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144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