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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러 동네 학교 운동장에 나갔다. 학교에 못 가 심심한 초등학생 여자아이 대여섯 명이 같이 공을 차고 있었다. 자전거 타던 꼬마 남자아이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응? 여자가 어떻게 축구를 할 수 있어?"

예닐곱 살 아이에게 성차별 인식 같은 게 있을 리는 없다. 여자가 축구하는 광경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슬슬 고정관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후배들과 함께 취재하다가 코로나 사태로 잠시 중단된 '걸스 두 잇' 기획 시리즈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정부 조사 결과 '최근 1년간 규칙적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답한 10대 여성이 43.4%였다. 4년 전엔 35.7%였는데 매년 늘었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 같다.

'여자의 몸'에 대한 여자들 자신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세계적 트렌드다. 국내 출판가에 최근 쏟아지는 책 제목은 직설적이다. '마녀체력' '여자는 체력' '운동하는 여자' '보통 여자 보통 운동'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원래 여자의 운동이란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와 동의어였다. 하지만 이 책들은 사회적 생존을 위한 근육 단련에 일제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쁜 몸'을 넘어 '강한 몸'을 추구한다.

세상 모든 여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 고로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100m 달리기 기록 전교 꼴찌를 지켰다. 운동신경이 워낙 둔해서, 앞으로 달린다고 달리는데 남들 보기엔 위로 통통 튄다고 했다. 빨리, 잘 달리는 방법을 어떻게 배워야 할지 몰랐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선생님에게 혼나기만 했다. 학창 시절 12년 내내 체육 시간 있는 날엔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런 내가 기자 생활 십수년의 절반을 스포츠 기자로 살아왔다고 하면 학창 시절 친구들은 웃는다. 농담인 줄 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특정 종목이나 팀, 스타의 팬이 아니다. 다른 스포츠 기자들처럼 역사를 줄줄 외우거나 룰을 꿰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몸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법을 몰랐던 내겐 운동선수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어떤 식으로 몸을 갈고닦아 저런 경지에 이르는지 누구보다 더 궁금하다. 취재하며 만나본 선수들은 자신의 몸을 다루는 법을 익히다가 덤으로 마음까지 잘 다루게 된 것 같았다. 몸을 수련하면 생각의 군더더기가 떨어져 나가는 걸까. 몸의 주도권을 쥐면, 마음을 다잡는 것이 그만큼 쉬워지는 듯했다.

'걸스 두 잇' 취재 현장에서 우리 기자들이 만난 '운동하는 여자'들도 비슷한 증언을 내놨다. 주말마다 모여 농구하고 축구하고 격투기도 배운다. "어떤 때 어떤 식으로 몸을 쓰는지 알게 되니 세상에 안 될 일 없는 것 같다" "튼튼한 근육을 기르니 내 몸이 나를 돕는 느낌이 든다" "내가 원하는 걸 큰 소리로 정확하게 말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운동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기회가 없어 나랑 잘 맞는 운동을 몰라봤을 뿐이다"….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잠시나마 스포츠 없는 세상을 살아봤다. 팀워크와 리더십, 희생, 자기 극복이 어우러진 예측 불가 스토리가 그리웠다. 공정한 경쟁, 불타는 투혼, 깨끗한 승부, 역경을 딛고 마침내 노력과 실력이 열매 맺는 동화 같은 드라마에 목말랐다.

이런 스포츠의 매력을 세상 모든 딸들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새길 수 있다면, 평생에 무엇보다 든든한 '백'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소녀가 운동장에 우르르 쏟아져 나와 자기 몸을 제대로 알고, 몸과 마음을 제 뜻대로 다스려보고,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인 채 땀 흘리며 스스로를 이겨내보는 특권을 실컷 누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