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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계곡' 따라… 여수에 예술이 흐른다

세계적인 친환경 건축의 대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는 물이 곱디고운 전남 여수(麗水)를 11년 전 처음 방문했다. 당시 40여년 전 국가산업단지가 가동한 여수는 공업도시로 변모한 문화 불모지였다. 2012년 5월 세계박람회 개최를 대비해 "문화 품격 높이는 수준급 공연장을 조성하자"는 각계각층 요구가 쏟아졌다. 이때 페로가 설계자로 낙점됐다. 페로는 서울 이화여대캠퍼스복합단지(ECC),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독일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등을 디자인한 세계적 건축가다.

여수시 등의 의뢰를 받은 페로는 나비처럼 생긴 여수반도의 해안 명소 12곳을 답사했다. 망마산 해변에 도착한 건축 명장은 번뜩이는 영감에 사로잡혔다. 고요한 산중 계곡에선 수원(水源)이 말라 물이 흐르지 않았다. 흔적만 남은 계곡의 끝자락은 바다와 만나고 있었다.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윤슬이 눈부셨다. 그는 "산과 계곡,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며 "'유리의 강(글라스 리버, glass river)'을 만들자"고 했다.

지난 6일 여수 시전동 망마산 비탈 계곡에는 물결 모양의 유리 지붕을 얹은 '예울마루'가 바다를 향해 웅크리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바다로 물이 흐르는 유리 지붕이 덮인 공연장을 짓자"는 페로의 구상이 실현된 것이다. 페로의 여수 방문 3년 뒤 '예술의 너울이 넘실대는 마루'란 뜻의 복합문화예술 공연장이 개관했다. 사업비는 1100억원. 예울마루는 8년이 흘러 '여수 문화의 발원지'가 됐다. 예술의 마루에서 출발한 '문화 물결'은 휘고 굽으며 여수 곳곳을 적시고 있었다.

예울마루는 외부에서 보면 비탈면을 따라 놓인 길이 152m 글라스 리버와 계단밖에 보이지 않는다. 공연장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산의 지하다. 페로와 설계작업에 공동 참여한 건설회사 창조건축은 가로 180m, 세로 46.6m 크기 직사각형으로 산을 깎아 파고 나서 건물을 세우는 방식의 설계를 적용했다. 지하 1층, 지상 7층, 연면적 2만5145㎡(7555평) 규모 건물이 오롯이 산의 배 속에 들어간 것이다. 경사면 밖으로 노출되는 건축물은 사실상 유리 지붕뿐이다.

개관 첫해 말 페로의 명성은 재확인됐다. 주변 환경과의 자연스러운 조화, 주요 공간의 지하 배치, 지붕 태양광 설비로 에너지 절약, 땅속 열을 활용한 난방 시스템 등이 호평을 받았다. 대한건축학회·토목학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 토목·건축대상'에서 최우수상도 받았다.

예울마루 주요 시설은 대극장(1021석), 소극장(302석), 전시실(3개), 리허설룸, 분장실(13개)이다. 3층엔 가로 43.4m·세로 20m 규격의 대극장 무대, 4·5층엔 대극장 객석이 있다. 산의 폐부(肺腑) 깊숙한 곳에 메인 공간이 자리 잡았다. 객석에서 무대까지 바닥 높이는 1m, 무대에서 1층 객석 끝은 길이가 21m에 불과하다. 최첨단 공연 시설도 갖춰 오리지널 공연이 그대로 무대에 오른다. 대형 뮤지컬 '맘마미아' '시카고' '브로드웨이 42번가' '캣츠' 등이 원래 무대 그대로 여수에 상륙했다. 공연 성격에 따라 소리 증폭을 조정하는 가변 벽체가 공연장을 둘러싸고 있어 음향이 뛰어나다. 정명훈, 정경화, 백건우, 양성원, 조수미, 조성진, 김선욱, 임동혁 등 한국 클래식계 거장들이 예울마루를 찾았다. 한상범 예울마루 기획홍보팀장은 "지휘자 정명훈은 '대극장과 리허설룸까지 완벽한 공연장'이라 극찬했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석유화학단지가 들어선 여수는 8년 전만 해도 차가운 공업도시였다. 여수산단 GS칼텍스의 사회공헌사업으로 탄생한 예울마루가 문화의 숨결을 지역에 불어넣으면서 여수는 문화의 품격을 갖춘 도시로 발돋움했다. 문화 건축물 하나가 도시 전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빌바오 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2017년 6월 관리와 운영을 넘겨받은 여수시도 운영비를 책임지며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7년 7개월 만에 누적 이용객은 88만명이었다.

예울마루 프로젝트 화룡점정은 '장도'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예술의 섬 장도 조성은 예울마루 마무리 사업이었다. 장도는 밀물 때 하루 두 번 물에 잠기는 진섬다리로 연결된다. 예울마루에서 뚜벅뚜벅 걸어도 5분쯤 걸린다. 사업비 280억원을 들여 9만4843㎡(3만평) 섬 부지에 전시관, 창작 스튜디오, 다도해 정원 등을 조성했다. 예울마루와 장도가 어우러져 하나의 복합문화예술공원이 됐다. 최근까지 장도에 20만명 이상이 입도했다. 김영관 창조건축 상무는 "망마산 정상에서 시작한 '문화의 폭포'가 예울마루를 거쳐 장도와 여수 전역으로 흐르게 하겠다던 페로의 꿈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기고자 : 여수=조홍복 기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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