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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넷 언론인 와타나베, 그의 왕국은 계속된다

    도쿄=이하원 특파원

    발행일 : 2020.05.28 / 사람 A2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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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요미우리신문 대표·주필 유임
    "기억력·논리력 전성기 못지않아"
    '막후의 쇼군'이라 불리는 실력자
    政言 유착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일본 요미우리신문사는 27일 사고(社告)를 통해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대표 겸 주필이 유임됐다고 밝혔다. 요미우리신문사는 전날 이사회에서 이같이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로써 와타나베 주필은 94세의 나이에도 일본 최고 발행 부수의 신문을 이끌며 논조에도 계속 관여하게 됐다.

    일본 사회에서 '막후(幕後)의 쇼군(최고 실력자)'으로 불리는 그는 걸을 때 가끔 보행기를 이용하나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상태다. 말은 다소 어눌해졌지만, 기억력과 논리력은 전성기 때에 못지않다는 게 요미우리신문사 관계자의 평가다.

    그는 언론계는 물론 정계에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언제든 아베 총리와 통화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NHK는 지난 3월 다큐멘터리에서 1991년 요미우리 사장에 취임한 와타나베의 주장과 행동이 헤이세이(平成) 시대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70년째 요미우리신문사에서 활동해 온 와타나베는 하나의 색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도쿄대 시절에는 공산당 지부 책임자였지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것에 반발해 전향했다. 그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찬성할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정반대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선 "역사도 철학도 모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교양도 없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와타나베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정언(政言) 유착의 대표적 기자이나 그의 활약은 전설적이다. 1950년대 당시 미래의 총리 후보로 꼽혔던 정계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를 담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오노의 양아들'이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로 그의 신임을 얻어 국회의원 공천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의기투합했다. 그를 총리로 만들기 위해 존 F 케네디가 미 대통령이 된 과정을 다룬 '대통령 만들기(The making of the president)'라는 책으로 학습 모임을 시작, 10년 넘게 함께 공부하며 친분을 두텁게 했다.

    와타나베는 한·일 수교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과 한·일 수교에 부정적이었던 오노 부총재를 만나게 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니시야마 다키치(西山太吉) 전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와타나베가 오노 부총재의 방한을 기획하고 동행자의 명단까지 만든 것은 물론 섭외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증언대로 와타나베는 자민당 부총재를 한국에 가게 하여 1면 톱 특종 기사를 쓴 데 이어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다시 단독 보도해 한·일 양국을 모두 흔들어 놓았다.

    와타나베는 1995년 아사히신문이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고 나서자 "공동 개최한다면 양국 모두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이를 지지하고 나서기도 했다.

    '요미우리의 황태자'로 불리며 승승장구해 온 그는 1991년 사장이 된 후 콘텐츠를 눈에 띄게 업그레이드했다. 일본 사회 우경화에 맞춰 보수적 색채가 강한 신문을 만들면서 공격적 경영으로 신문 부수를 늘려왔다. 일본 언론계에서는 그의 지나친 권력 지향성을 지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조직 내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와타나베 왕국'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본에서 요미우리신문은 디지털화에 가장 늦은 신문으로 통하는데 그 배경으로 '페이퍼 신문'에 집착하는 와타나베를 지적하기도 한다.
    기고자 : 도쿄=이하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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