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많으면 나누고, 없어도 나눈다… 45년 우리의 원칙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발행일 : 2020.05.29 / 문화 A18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전진상 공동체' 배현정 원장

    "초진(初診)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환자가 문 열고 들어오는 몇 초 사이에 진찰을 시작합니다. 걸음걸이, 표정을 보면서요. 이미 거기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옆으로 돌아앉지 않고 책상을 문과 정면으로 마주 보도록 놓았지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전진상의원' 원장실. 벨기에 출신 배현정(74·본명 마리헬렌 브라쇠르) 원장은 사뭇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시로 파안대소했다.

    배 원장과 최소희(82) 약사, 유송자(76) 사회복지사 등 삼총사가 1975년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문을 연 '전진상 공동체'가 45주년을 맞았다. 지난 10일엔 손희송 주교 주례로 기념 미사가 열렸고,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전진상에는 유쾌한 언니들이 산다'(오르골출판사)도 출간됐다. 세 사람은 국제가톨릭형제회(AFI·아피) 회원이다. 아피 회원들은 평신도이지만 독신으로 봉사에 헌신한다. '전진상'은 '온전한 자아 봉헌(全), 참다운 사랑(眞), 끊임없는 기쁨(常)'이란 뜻이다.

    '시흥 전진상'의 시작은 매년 1월 1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김수환 추기경의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권유였다. 1972년 한국에 온 배 원장은 애초 소록도에 가고 싶었지만 김 추기경은 서울을 권했다.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이삿짐 트럭 행렬을 보면서 변두리 판자촌이 걱정됐던 것이다.

    당시 4만 명이 거주하던 시흥 판자촌은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없고 환자의 10% 이상이 결핵 환자일 정도로 열악한 환경. 배 원장은 "초기에 산동네로 왕진 가면 결핵 환자들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 쉬고 있었다"고 했다. 삼총사는 이곳에서 약국을 시작으로 의원, 복지관, 호스피스센터, 지역아동센터까지 설립하며 45년을 보냈다. 한국 최초의 사제 겸 의사로서 전진상의원 초반 진료를 도맡았던 김중호(81) 신부의 소개로 서울대 출신 의사들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간호사였던 배 원장은 김 신부의 권유로 의대에 편입해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영등포역 앞에서 행려병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다 세상을 떠난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도 초기 전진상의원 봉사자였다.

    전진상의원에선 모든 초진 환자가 먼저 상담실에서 상담한 뒤 '가계도(家系圖)'부터 그린다. 경제적 여건을 비롯한 가정의 상황과 각 구성원이 처한 문제나 질병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 이 과정에서 필요한 지원 대책이 결정된다. 배 원장은 상담을 마친 환자의 이야기를 또 들어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찰한다. 배 원장은 "'그런 상황이면 나였어도 아프겠다'고 말해주면 그걸로 두통이 낫는 경우도 있다"며 웃었다. 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을 경청(傾聽)으로 치료하는 것. 그래서 초진은 30분 이상 걸린다. 고(故) 이태석 신부가 "환자가 진료소에 들어오면 2~3분간 가만히 관찰한다. 그러면 말이 안 통해도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에피소드가 없을 수 없다. 폐에 고름이 차는 바람에 심장이 오른쪽으로 밀려간 소녀를 들쳐 업고 큰 병원으로 달려간 이야기처럼 아픈 사연이 부지기수다. 그렇지만 유쾌한 얘기도 푸짐하다. 전진상 식구들이 경차로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뷔페를 대접하러 갔더니 처음엔 푸대접하던 호텔 직원들이 막상 그 차에서 김 추기경이 내리자 대경실색했던 '티코 사건'도 있고, 키우던 개가 1만원짜리 지폐를 씹어먹은 바람에 남은 반쪽을 들고 한국은행에 통사정해 5000원을 받아온 사건도 있었다.

    "45년 전엔 시흥을 선택했는데, 지금이라면 어디서 봉사하고 싶냐"는 질문에 배 원장은 "봉사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봉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휠체어를 타더라도 봉사할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시각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전화라도 받을 수 있잖아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 우문에 현답이었다.
    기고자 :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본문자수 : 1974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