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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게 밤샘 작업은 일상이다. 열 시간 넘게 그림만 그렸는데, 완성은커녕 눈꺼풀만 무겁다. 이럴 때면 잔에 든 커피가 새삼 고맙다. 종류는 늘 차가운 아메리카노. 붓질을 하다 말고 서너 모금을 내리 들이켠다. 2차 대전 때 이탈리아로 파병 간 미군이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 마신 데서 아메리카노가 유래했다고 한다. 일거리와의 전투를 보조해 주는 음료로서, 전장에서 태어난 아메리카노는 그 탄생 설화마저 적절하다.

어제는 친구와 커피를 마셨다. 내가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정신이 든다'며 과장된 탄성을 지르자, 친구는 '카페인이 작용하려면 최소 20분이 걸린다'며 일종의 '팩트체크'에 나섰다. 하지만 무안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일은 마치 의식(儀式)과도 같아, 입술이 닿기만 해도 흐렸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랄까.

과거엔 커피의 힘을 두려워한 위정자들이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무라드 4세는 커피 금지령을 내렸고,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는 커피 대신 술을 마시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백성들이 지적인 대화와 토론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커피가 이슬람권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을 때, 극성 기독교인들은 교황에게 커피를 금지해달라 탄원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교도들에게 양보하기엔 이 사탄의 음료는 너무나 맛있다'며 커피 원두에 직접 세례를 내렸다. 곧 유럽 전역에 커피하우스가 생겼고, 그곳들은 미래에 시민혁명의 모의처가 된다. 잠을 깨우는 커피엔 말 그대로 각성의 역사가 녹아 있다.

화가라고 하면 으레 커피보다는 술을 더 가까이할 줄 안다. 감성과 즉흥에 취한 화가의 스테레오타입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수학적이라 할 만큼 이성적이고 치밀해야 한다. 조형적 질서는 정교하며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초상화를 그릴 땐 더 그렇다. 미세한 오차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술로 정신을 흐렸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 그림에선 커피 냄새가 난다. 이 '사탄의 음료'를 마시며, 지금 이 순간 작업에 집중하고 마감을 엄수할 마력을 얻는다. 기고자 : 정중원 초상화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064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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