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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출간 예정이었던 국내 여행서를 원고 마감 직후 출판사 사정으로 계약 해지하게 됐다. 팬데믹 때문에 여행이 멈춘 시기라는 건 불가항력이었지만 그간 준비한 것의 결과물을 볼 수 없다는 좌절, '내 원고가 별로였나?'라는 끊임없는 자책이 하루가 다르게 이어져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시대의 대세인 줌을 활용해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랜선 글방'과 '랜선 독서 모임'을 열어 혼자 읽던 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나누기 시작했다. 그중 운동 관련 책을 읽고 모이는 모임이 있었다. 나이대도 다르고 운동 경험치도 다른 여성들이 모여 질문과 답을 나누니 90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 모임 이후 나는 동네 검도장을 찾아보게 되었다.

여행작가란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와 그곳에 대한 글과 사진을 남기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익숙한 곳일지언정 그곳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 믿는다. 일상을 조금 더 눈여겨보는 시간을 통해 잠시나마 '지금 여기'를 여행지처럼 느낄 수 있다.

매일 오고 가던 길의 동선을 바꿔보고, 늘 차를 타고 다니던 곳을 직접 걸어보고, 평소의 나라면 읽지 않았을 책을 읽어보고, 제때 꽃 피는 일의 분명한 아름다움을 알고, 발견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여행'이라 생각한다. 랜선 독서 모임의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검도장을 알아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나를 만나보는 것도 여행이 아닐까! 이국적 풍경과 낯선 시차, 날씨 등을 느끼며 여행을 시작하는 일이 여전히 그립지만 지금 우리가 여행의 허기짐을 달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인 것 같다.

계약이 해지된 나의 원고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 출판사를 찾고 있고, 랜선으로 만나는 이들과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팬데믹 시대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 이들과 나는 2021년 봄을 여행하고 있다. 기고자 : 이지나 여행작가·'서울 재발견' 저자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988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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