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제31회 이해랑연극상 받는 무대 미술가 이태섭

무대 미술가 아니랄까 봐 이태섭(67)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조명·분장·의상처럼 배우를 빛나게 하는 '뒷광대'. 여차하면 무대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스태프라서 눈에 띄지 않을수록 좋다. 그는 "옷장을 열면 검은 옷 천지"라고 했다.

이해랑연극상이 제31회 수상자로 이태섭을 선정했다. 무대 미술가가 호명되기는 박동우(16회) 이후 처음이다. 지난 2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이태섭은 "소식을 접한 날 하루 종일 기뻤고 이튿날부턴 후회와 책임감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이해랑(1916 ~1989) 선생님이 수여하는 상이니 가문의 영광이죠. 무대 미술의 가장 큰 뿌리는 연극인데 더 열과 성을 다했어야 한다는 후회,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기쁨 못지않게 큰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이태섭은 1990년 국립극장 연극 '오이디푸스 렉스'로 데뷔해 30년 동안 연극·무용·오페라 등 200여 편의 무대 미술을 책임졌다. 그는 "1960년대 말 이해랑 선생님이 연극을 보급하던 이동극장(移動劇場)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보았다"며 "경기도 오산중학교 다닐 땐 연극 '동승'에서 주인공을 연기해 박수를 받고 배우를 꿈꾸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중앙대 회화과 졸업 후 첫 직업은 교육방송(EBS) 세트 디자이너. 1980년대 초 교육방송 PD였던 김철리를 따라 퇴근 후 서강극단에 가면서 연극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서강대 메리홀에서 공연한 '굿 닥터' 등의 세트를 제작하면서 무대 디자이너로 첫발을 뗀 것이다. 미국 뉴욕시립대 브루클린칼리지 MFA(실기석사) 과정에서 무대 디자인의 실무를 배웠다.

이태섭은 1995년부터 용인대 교수로 후학을 기르면서도 줄기차게 작업했다. 무대 디자인을 그는 어떻게 정의할까. "텍스트는 희곡일 수도 있고 음악, 움직임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혼돈 상태예요. 무대 디자인은 그것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질서한 텍스트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고, 공연의 골격을 만드는 작업이에요."

이날 명동예술극장에서는 연극 '조씨고아'(연출 고선웅) 세트를 설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태섭이 무대 미술을 맡았다. 반원형 무대는 연극 속의 연극 같은 인생을 은유한다. 모든 소품은 무대 위에 진열되어 있거나 바닥에서 나타나거나 사라지면서 결국 빈 무대로 남게 된다.

시간과 돈. 무대 미술가는 이 두 가지에 현명해야 한다고 이태섭은 강조했다. "어느 시점엔 이상을 접고 현실로 돌아서야 한다"며 "연극 '조씨고아'는 빈 무대처럼 보이지만 배우들이 잘 보이도록 경사를 높이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배우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무대 미술가가 이태섭? 그 연극 너무 힘들겠다. 이태섭은 배우들을 괴롭히니까." 당사자는 항변했다. "저는 배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무대를 추구할 뿐입니다. '오이디푸스'에서도 평평한 무대를 세워 절벽에서 위태롭게 연기하니까 인물의 처절한 몸부림이 더 잘 보였어요(웃음)."

그는 리얼리즘(사실주의)에서 이미 솜씨를 입증한 무대 미술가다. 윤여정과 송승환이 주연한 '유리동물원'(1997)이 대표적이다. "무대 미술가는 글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도 시각적으로 반응하는 훈련을 해요. 무대 미술이 뭔지 설명하는 말 중에 '이야기를 보여주려 하지 마라. 이야기가 일어나게 하라'가 있어요. 그것을 지향합니다."

2011년 '오이디푸스'(연출 한태숙), 2014년 '리처드 2세'(연출 펠릭스 알렉사), 2015년 '리어왕'(연출 윤광진), 2015년 '조씨고아', 2018년 '오슬로'(연출 이성열)를 베스트5로 꼽았다. 이태섭은 "집요한 연출가들과 부딪치고 영향을 받으며 어떤 신뢰가 쌓이면서 나도 성장했다"고 말했다. 수상 이후 각오를 물었다.

"이해랑연극상은 묵직한 사명감을 느끼게 해준 상입니다. 연극계, 넓게는 공연계에서 더 진지하게 더 세련되게 작업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봉사도 할 생각입니다." 기고자 : 박돈규 기자
본문자수 : 1985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