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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는 내리면 날씨가 따뜻해지고, 가을비는 추워진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굴장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급해졌다. 자꾸만 구석에 모셔놓은 굴젓에 눈이 갔다. 좀처럼 종일 불을 피우며 쳐다보고 있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마침 주말을 맞아 비가 내렸다. 어장에 가는 일을 멈추고 큰 솥을 걸고 불을 지폈다. 뚜껑을 열고 보니 40여 일 전 만들어 놓은 굴젓양이 많이 줄었다. 대신 자박자박 감칠맛 나는 굴장이 가득하다. 그 위로 살구꽃처럼 발그레한 굴이 동동 떠 올랐다. 살짝 찍어 맛을 보니 잘 숙성된 것 같다. 어간장이 그렇듯이 제 몸을 삭혀낸 굴장이다.〈사진〉

오롯이 굴이 품은 육즙과 천일염이 만나 숙성된 것이다. 일주일마다 뒤집기를 세 차례, 그리고 오늘 굴과 장을 분리한다. 요즘 하는 '된장가르기'처럼 '굴장가르기'라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걸러낸 굴장을 12시간 끓인다. 보약처럼 달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거품을 걷어내고 물을 부어가면서 달이기를 반복한다. 그 옆에 어머니 몇 분이 가을에 시작할 굴 양식을 준비하고 있다. 한쪽에서 1년 굴 농사를 준비를 하고, 한쪽에서 1년 먹거리를 준비한다. 그 모습이 숙연하다.

해창만을 한 바퀴 돌고 오니 그사이 굴장은 보글보글 끓으면서 갈색으로 변했다. 내일 아침이면 진한 갈색으로 바뀔 것이다. 아침 8시에 불을 붙였으니, 저녁 8시까지 불을 꺼트리지 않아야 한다. 나무로 불을 지펴 끓이던 옛날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흥 섬마을 집집마다 자신들이 먹을 것과 뭍으로 나간 가족들 몫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끓인 굴장에 갈무리해 둔 굴을 올린 것이 '진석화젓'이다. 지금은 삭힌 굴과 끓인 굴장을 따로 보관한다. 고흥 섬마을에서는 그 자체로 반찬과 조미용으로도 이용했다. 김장할 때 넣기도 했다. 밥상에 장은 떨어져도 이 굴장만은 끼니마다 올라왔다. 굴과 소금 그리고 여기에 시간과 불을 더했을 뿐이다. 가장 원시적이며 근원적 음식이다. 기고자 :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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