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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2) 나폴레옹 다시 보기 (상) 권력 잡은 섬소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발행일 : 2021.06.01 / 여론/독자 A2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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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바꾸고 서른살에 쿠데타… 코르시카 '촌놈'이 대권을 잡다

    "천재적인 인물들은 자신을 불태워 세기(世紀)를 밝히는 유성(流星)이다."

    초급 장교 시절이던 1791년, 나폴레옹이 리옹 아카데미 콩쿠르에 참가하여 쓴 글이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이 악마적인 영웅은 조만간 자신을 불태우고 유럽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섬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그가 프랑스 장군이 되고 황제로 등극하는 것은 코르시카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768년,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소속 영토였던 코르시카가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di Buonaparte)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지지하는 편에서 싸우다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덕분에 프랑스 국왕에게서 귀족 작위를 얻었다. 나폴레옹의 운명은 여기에서부터 방향이 잡혔다.

    당시는 장교가 되려면 귀족 작위가 필요하던 때다. 나폴레옹은 브리엔의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파리의 군사 학교(Ecole Militaire)에 진학했다. 동급생 귀족 자제들은 코르시카 사투리가 심한 그를 거의 외국인 취급을 하며 놀려댔다. 코르시카어는 불어와 크게 달라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진격 명령을 못 알아들은 코르시카 출신 병사가 명령불복종 죄로 처형당한 일도 있다. 말수 없고 친구 없는 곱슬머리 코르시카 청년은 독서에 매진하였고, 계몽주의 사상과 문학, 역사에 흠뻑 빠졌다.

    1784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부르고뉴 지방에서 근무할 때 프랑스혁명을 맞이했다. 혁명정부가 그에게 맡긴 첫 번째 중요한 임무는 왕당파가 불러들인 영국군을 축출하고 툴롱(Toulon)항을 되찾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항구 주변 언덕에 포를 배치하여 영국 전함들을 내쫓았다. 이때 그의 능력을 알아본 혁명정부의 실력자 폴 바라스(Paul Barras)는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폴레옹은 무려 1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살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정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이때 조제핀을 만난다. 조제핀은 카리브해의 섬 마르티니크에 이주한 프랑스인의 후손(크레올)이었다. 16세에 파리로 온 그녀는 보아르네 장군과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았는데, 혁명 와중에 수감되었다가 남편은 처형되고 조제핀은 석방되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사교술과 매력으로 파리 상류사회에 진입하려던 그녀는 바라스의 연인이 되었고, 곧 그의 부하 나폴레옹의 연인으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1796년 3월 2일 결혼했다. 결혼 직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불같은 사랑의 편지들을 써 보냈는데, 정작 조제핀은 편지를 전달하러 온 장교들과 연인 관계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원정군을 지휘하던 무렵 나폴레옹은 자신의 이름을 살짝 바꿨다.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pol eone di Buonaparte)'보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on Bonaparte)'가 훨씬 더 프랑스 장군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는 곧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피에몬테, 트리에스테, 베네치아 같은 곳들을 점령한 다음 프랑스에 충성하는 '자매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회화와 조각품 수백 점을 빼앗아서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이 덕분에 후일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이 더욱 풍성해졌다. 밀라노에 있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훔쳐오고 싶었으나 거대한 벽 전체를 뜯어내는 일이 힘들어서 포기했다. 대신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에 있던 유명한 말 조각상은 파리로 가져와 카루젤 개선문 위에 올려놓았다(나중에 베네치아로 반환했다).

    다음 과업은 영국 정복이다. 영불해협은 고작 30여 킬로미터에 불과해서 건너편 지역에서 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일 정도다. 케자르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처럼 이 해협을 건너느냐,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못 건너느냐가 유럽 역사의 큰 흐름을 좌우하곤 한다. 오랜 준비를 했지만 나폴레옹은 끝내 강력한 해군이 지키는 영국에 상륙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이집트를 정복해서 영국의 인도 무역을 방해하자는 것이다. 1798년 소위 피라미드 전쟁에서 승리하고 거침없이 카이로에 입성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자 나폴레옹군은 이집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군사 상황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이 떠난 틈을 타서 부하에게 군대를 맡기고 파리로 돌아갔다. 명령 없이 이탈했으므로 사실은 탈영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제재하지 못했다. 귀국 한 달 뒤 그는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혁명정부가 위기에 빠지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시에예스가 쿠데타를 계획한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을 '개혁의 칼'로 선택했다. 자신처럼 노련한 인물이면 30세의 젊은 장군을 떡 주무르듯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완전한 오산이었다. 거꾸로 나폴레옹이 시에예스를 인절미 주무르듯 가지고 놀았다. 권력을 잡은 후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에게 예우는 해 주되 실권을 빼앗았고, 사실상 그가 대권을 잡았다.

    권력을 정당화하는 새 헌법이 필요했다. 헌법 초안을 만드는 회의에서 한 사람이 "헌법은 단순해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거들었다. "그리고 불투명해야죠!" 불투명해야 독재가 가능하다.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진 소위 혁명력 8년 헌법을 투표에 부의하자 찬성 300만 대 반대 1567로 통과되었다. 새 체제는 여전히 공화정 모양새였지만 사실상 나폴레옹 독재였다. 국왕이 돌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튀일리 왕궁에 거처를 정하고, 여행할 때도 국왕의 의상을 입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경찰 조직을 강화하고, 스파이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감시했다. 1802년에는 레지옹 도뇌르(L?[gion d'honneur) 훈장 제도를 만들었다. 훈장은 원래 용맹한 군인들에게 하사하는 것이지만, 예술가와 작가 역시 그들의 재능으로 국가에 공헌하는 건 똑같다는 주장이다. 그러고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런 딸랑이로 사람들을 부리는 걸세." 나중에는 프랑스 문화 발전에 기여한 외국인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 존경하는 작가 괴테를 만나 독일 문학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괴테도 '딸랑이' 훈장을 받았다.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장군이 강도 혐의자를 찾는다며 마음대로 농민들 집을 뒤지고 다녔다. 나폴레옹은 군인들에게 즉각 귀대하고 민간 기구에 조사를 넘기라고 지시했다. 나폴레옹 자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한다. 독재는 한 사람만 하는 거다.

    장물 가득한 루브르박물관
    나폴레옹 가는 곳마다 전리품으로 뺏은 작품 덕분에 예술 중심지로

    혁명정부는 군주제 폐지 1주년 기념으로 '공화국 중앙박물관'을 열어 지난날 왕실 예술품들을 일반에 공개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현재의 박물관 모습을 갖춘 것은 나폴레옹 덕분이다. 동양학자 마르셀(Jean-Josephe Marcel)과 서지학자 드농(Dominique Vivian Denon)의 노력으로 '나폴레옹 박물관'이 자리를 잡아갔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국보급 예술품들을 빼앗아 자신의 박물관에 두었다.

    워털루 전투 이후 각국은 프랑스에 약탈품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박물관장 드농은 가능한 한 버텼다. 결국 많은 작품이 그대로 루브르에 남았다. 대신 매입 대금 명목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든지, 혹은 베로네세의 대작 '가나의 혼례' 같은 경우는 프랑스 화가 르브룅 작품과 교환하기로 했다. 나폴레옹이 훔쳐온 장물 덕분에 파리는 세계 최고의 예술 중심지로 거듭났다.
    기고자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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