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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견훤과 후백제

    유석재 기자

    발행일 : 2021.06.03 / 특집 A3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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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왕 무릎 꿇렸지만… 후계 다툼으로 36년만에 무너졌죠

    우리 역사에서 후삼국 시대(901~936년)는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태봉)의 세 나라가 정립(鼎立·세 세력이 솥의 세 발처럼 버티고 선 것)했던 시기예요. 사실 926년까지는 북쪽에 발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네 나라가 있었던 셈이죠. 이 중에서 서기 900년부터 936년까지 36년 동안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북 전주에서 당시 유적을 찾는 정밀 조사가 연말까지 진행된다고 해요.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아기 때 호랑이가 젖 먹였대요

    "신라의 김유신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지금의 충남 부여)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백제를 쳐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전주)에 도읍해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으려 한다."

    견훤은 후백제를 세울 때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660년에 멸망한 백제를 240년 만에 되살리겠다는 말로 옛 백제 땅이었던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것이죠.

    하지만 견훤이 과연 옛 백제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이에요. 견훤의 아버지는 원래 신라 땅이었던 경북 문경의 호족(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이었다고 전해지는 아자개였기 때문이죠.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는 아자개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려고 포대기에 싸인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어요.

    이 설화는 견훤이 어려서부터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줘요. 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처음에는 부유하지 않은 농민 출신이었다는 점도 드러나죠. 삼국사기 기록엔 '견훤은 어려서부터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생각이 활달했다'고 해요. 서기 9세기의 신라는 왕위를 둘러싼 귀족들 싸움과 사치·부패로 중앙정부 힘이 약해지고 지방 곳곳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혼란스러웠을 때였습니다. 세금을 거부하는 민란이 일어났고, 농민이 힘을 키워 장군이 되는 일도 생겨났죠. 각지 호족은 농민을 끌어들여 무장 세력이 됐고, 신라 관등 제도에 따라 출세가 제한됐던 6두품들이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신라 왕을 '포석정'에서 죽였어요

    견훤은 신라 군대의 장교가 돼 서남 해안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자기 세력을 키워 900년(효공왕 4년)에는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901년에는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해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했죠. 같은 해 신라 왕족 출신의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고, 918년에는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세운 고려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후 견훤은 왕건과 후삼국의 주도권을 놓고 계속 경쟁하는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죠.

    견훤이 가장 큰 성공을 거뒀던 해는 927년이었습니다. 신라 도성인 금성(경북 경주)을 공격해 포석정(연회 장소)에서 신라 55대 임금 경애왕을 사로잡아 죽였고, 경순왕을 왕으로 앉혔어요.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에요. 견훤은 이후 공산(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와도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왕건은 이때 거의 전사할 위기에서 간신히 달아났다고 하는데요. 이 기세대로 갔다면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아들에게 배신당해 고려에 항복

    929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 크게 패하기도 했지만, 견훤의 결정적인 몰락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 때문이었어요. 그는 넷째 아들인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장남 신검이 935년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라는 절에 가두고 왕이 됐어요. 견훤은 절을 빠져나와 고려에 항복했고, 이듬해인 936년 왕건의 군대가 신검과 싸워 이겨 후백제는 멸망했습니다. 후백제는 생긴 지 36년 만에 사라져버린 거예요.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견훤이 지나치게 무력을 믿고 개혁 의지가 약했던 것이 실패의 큰 원인이었다고 해요. 김갑동 대전대 교수는 신라군 장교 출신으로 보수적이었던 견훤이 새로운 정치·사회 체계를 수립하지 못했고, 힘만 있으면 다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신라 왕을 죽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후 신라인에게 역적 취급을 받았다고 봤어요.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견훤이 신라를 멸망시키는 대신 기존 질서를 존중하며 경쟁자인 왕건을 제압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았고, 중국의 후당·오월, 북방의 거란, 일본 등과 폭넓은 교류를 시도하면서 '전통 속의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했어요. 36년간의 짧은 후백제의 역사 역시 우리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소중한 문화 자산이었다는 주장입니다.

    후백제 2대 왕 '신검'

    견훤의 장남인 신검은 서기 935년부터 936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후백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임금이에요. 부왕(父王)인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찬 벼슬의 신하 능환과 두 동생 양검·용검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동생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어요.

    하지만 936년 고려 태조 왕건과 일선군(경북 구미)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해, 왕위에 오른 뒤 1년 반 만에 후백제는 멸망했습니다. 능환과 두 동생은 처형된 반면 신검은 고려에서 벼슬을 얻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신검의 사망 기록이 뒤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신검도 이때 동생들과 함께 살해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견훤이 왕건과 경쟁에서 불리해지자 타협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인 신검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는 분석도 있어요.

    기고자 :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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