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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집권 22년 베네수엘라, 조폭이 식량부터 치안까지 장악

    이벌찬 기자

    발행일 : 2021.06.04 / 종합 A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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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首都까지 파고든 갱단… 사실상 정부 역할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대통령궁에서 6㎞ 떨어진 빈민가 엘세멘테리오. 흙먼지 날리는 이 지역 공터에 최근 공기 주입형 놀이 기구(에어바운스)가 설치됐다. 미끄럼틀 등이 갖춰진 어린이용 놀이 기구다. 깜짝 선물을 마련한 주인공은 바로 이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범죄 조직. 아이들은 총칼로 무장한 조직원들이 지키고 선 놀이 기구 앞에 길게 줄을 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딸 손을 붙잡고 온 한 엄마는 "갱들은 우리 지역의 치안과 식량을 책임질 뿐 아니라 문화 생활까지 신경 써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무너진 경제와 치안 부재, 민심 이반 등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식물 정부'로 전락한 가운데, 베네수엘라 곳곳에서 범죄 조직이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했던 부국(富國)이 빈국도 모자라 '조폭 천하'가 된 것이다. 베네수엘라에는 범죄 조직이 최소 1만8000개 있고, 조직원이 100명 이상인 대규모 조직은 25곳이 넘는다. 특히 이들은 폭력과 마약 등 '종전 활동 영역'을 넘어 통치 행위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일(현지 시각) "이 범죄 조직들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수도(首都)마저 잠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는 마두로 집권 이후 빠르게 빈국으로 전락했다. 14년간 집권했던 차베스 전 대통령 통치 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경제는 마두로 등장 이후 완전히 몰락했다. 2013년 차베스 사망으로 정권을 잡은 마두로는 '차비스모(차베스의 포퓰리즘 좌파 이념)'를 계승해 석유 산업 국유화와 과도한 무상교육·의료 복지 정책을 이어갔다. 여기에 국제 유가가 급락하고, 부채를 갚기 위해 화폐를 무한정 찍어내면서 초(超)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2018년 인플레율은 170만%에 달했다. 최근 6년간 국민 5명 중 한 명(550만명)이 조국을 떠났고, 국민 3분의 1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전 국민의 평균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미국·유럽은 마두로의 야당 탄압, 부정선거 등을 이유로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 제재 수위를 높였다.

    수도 외곽과 지방 빈민가는 치안과 민생이 모두 망가졌다. 블룸버그통신은 "공무원·경찰도 월급을 제때 못 받아 부업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빈민가의 의사·교사·신부(神父)·자원봉사자들도 살길을 찾아 떠났다.

    범죄 조직들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 엘세멘테리오와 코타905, 라베가 지역 30만 주민은 400명 규모의 범죄 조직이 손에 넣었다. 미란다주 경계에 있는 페타레 지역도 조폭이 차지했다. 이들은 최신형 드론·오토바이·총을 동원해 지역을 지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빈민의 지도자'라고 칭하고 있다. 범죄 조직들은 실질적 '자치 정부' 역할을 한다. 주민들에게 식량과 약을 공급하고 장례식 비용을 지급하는 건 기본이다. 분기마다 음악회와 스포츠 행사를 개최하거나 후원한다. 특히 미국 제재로 해외 물품 조달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직이 밀수입하는 약품은 주민 생존에 필수적이다. 페타레를 점령한 조직은 매년 지역 주민들을 위해 '연 날리기' 행사를 열고, 지난해 코로나 사태가 극심해졌을 땐 코로나 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카라카스 빈민가를 장악한 범죄 조직은 도둑질과 가정 폭력 척결에 나서 민심을 얻었다. 이들은 도둑을 붙잡으면 손을 총으로 쏘는 형벌을 내리고, 가정 폭력범은 두 번 이상 적발되면 총으로 쏜다.

    조폭 치하의 주민들은 마두로 정권보다 이들이 낫다고 말한다. 코타905에 거주하는 벨키씨는 NYT에 "주민 대부분은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하고 있다"면서 "그들(범죄 조직)만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했다.

    범죄 조직의 '지방 분권'은 정부가 묵인한 결과란 분석도 있다. 공권력 부족으로 수도 외곽과 지방 도시들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자 범죄 조직이 지역을 기반으로 마약 거래, 불법 금 광산 채굴, 밀수 등을 통해 덩치를 불렸고, 정부 관리들은 주민들의 반정부 소요 사태를 막는 것을 조건으로 이들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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