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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애리조나에 반도체 기업이 몰리는 까닭

    이길성 산업부 차장

    발행일 : 2021.06.07 / 여론/독자 A3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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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반도체 3강 미국, 한국, 대만의 반도체 투자 전쟁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지명이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州)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1위 대만 TSMC가 120억달러(약 13조5000억원)를 들여 짓는 5nm(나노미터) 초미세 공정 반도체 공장, 글로벌 반도체 1위 미국 인텔이 200억달러(22조5000억원)를 투자해 짓는 새 파운드리 공장들이 들어서는 곳이 애리조나다. 170억달러(19조원)를 투자해 미국에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한 삼성전자도 텍사스·뉴욕과 함께 애리조나를 유력한 후보지로 저울질하고 있다. 만약 삼성전자까지 이곳에 공장을 짓는다면? 애리조나는 글로벌 반도체 빅3를 한번에 품은 글로벌 반도체 최고 성지(聖地)로 떠오르게 된다.

    미 서남부 사막지대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룡들이 모여들자, 미 언론들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는 가고 애리조나의 실리콘 데저트(사막)가 온다'는 보도까지 내놓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애리조나일까. 한국 3배 면적의 애리조나가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기 좋은 입지상 장점은 분명하다. 지진·토네이도·태풍 같은 거대 재해가 거의 없는 자연환경, 미국 최대 원전 단지를 축으로 한 안정적인 전력망, 미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땅값이 고루 강점이다. 1980년대 일찌감치 이곳에 반도체 공장을 세운 인텔이 구축한 반도체 부품 생태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조건만으로 해외 반도체 공장이 성공한다면, 대만의 잦은 지진과 전력·용수난에 시달려온 TSMC는 진작 태평양을 건넜을 것이다.

    애리조나는 그랜드캐니언과 사막이라는 자연 경관을 빼면 내세울 게 없는 곳이다. 애리조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서쪽으로 주(州)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존재다. 미국과 전 세계 인재와 자본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미국 최강, 나라로 치면 세계 5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캘리포니아가 하필 옆집 이웃인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환경이 애리조나를 '기업 귀한 줄 아는 곳'으로 만들었다. 기업 유치를 통한 일자리 만들기가 절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 20년간 애리조나 주지사들은 레드(공화당)냐 블루(민주당)냐를 가리지 않고 일관되게 법인세를 포함한 기업 관련 세금을 미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각종 기업 지원책을 강화해왔다. 노동자가 노조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권리법'을 도입해 강성 노조가 뿌리내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애리조나가 TSMC라는 월척을 낚은 건 이 같은 노력이 축적됐기 때문이다.

    애리조나가 '기업의 천국'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지난달 우리 정부는 대통령이 참석한 'K-반도체 벨트'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반도체 업계의 숙원이었던 각종 세제 혜택, 인프라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한 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관련 법이 국회를 통과해 바뀌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여당 마음이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는 게 우리 기업들의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지난 한미 정상 회담 때 우리 기업 총수들은 44조원 대미 투자 선언 덕분에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박수를 받았고, 돌아와선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상찬을 받았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대기업들을 상대로 적폐 몰이를 했던 게 이 정권 사람들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애리조나만큼만 일관되게, 이벤트가 아닌 정책과 실천으로 우리 반도체 산업을 챙겨 보라. '나라가 기업이 귀한 줄 안다'는 믿음을 준다면, 한국 기업들은 사막이 반도체 허브가 되는 기적보다 더한 일을 해낼 것이다.
    기고자 : 이길성 산업부 차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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