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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념일로 지정된 6·10만세운동, 독립 정신의 큰 봉우리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발행일 : 2021.06.08 / 여론/독자 A3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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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 만세 운동이 작년 말 국가 기념일로 지정이 되어 올해 처음 기념식이 열린다.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일어난 이 운동은 주로 중앙과 중동 고보 등의 학생들 중심으로 이들이 격문을 뿌리고 독립 만세를 외친 사건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기념일 지정이 늦은 이유 중의 하나도 3·1 운동에 비하면 실제적인 규모나 파장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의 사실과 그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현실 인식에 큰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은 규모의 문제이다. 6·10 만세 사건은 그 준비 과정에서 3·1 운동 못지않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3·1 운동 당시에 한국인들의 선진적인 의식과 조직 및 행동 규모에 크게 충격을 받은 일제는 이번에는 철저한 대비를 한 것이었다. 동원된 육해군 병력만도 7000명에서 1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서울에서는 특히 중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병력과 경찰력으로 경비에 임하였다. 그 위에 이른바 예비 검속 등 철저한 사찰로 중요 인사들을 미리 검거하였고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거사 준비의 일부가 노출되어 전국적인 운동에 차질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만세 운동에 나선 학생들의 처벌에도 신중을 기해 그 인원수 등을 극히 소수에 국한하여 운동의 규모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일제의 세심한 조치는 후세에까지 일정한 성과를 본 셈이다.

    그러나 6·10 만세 운동은 그 숨겨진 규모보다 또 다른 면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1920년대 초반 민족운동은 특히 이른바 자유시 참변 이후 저조한 면을 보였다. 그러나 6·10 만세 운동은 한국인의 자주 독립 의지가 좌우 이념적인 갈등까지 초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3·1 운동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거사에 함께한 것이 세계사에 드문 사건이었다면 6·10 만세 운동은 민족적 차원의 거사에 이념적인 갈등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는 것이다. 당일 일제의 의표를 찌르고 거리로 나온 소년 학생들 이름 중에는 박용규, 곽대형 등과 함께 우리에게 익숙한 이현상도 들어있다. 그보다도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이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던 지도자급 인사들의 이름 중에는 송진우, 김성수, 최남선과 함께 박헌영도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까지 우리의 정치적인 능력에 고질적인 제약이 된다고 믿는 이념의 대립을 자주 독립의 대의 앞에서 초월할 수 있었다는 좋은 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6·10 만세 사건이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마침내 국가 지정 기념일이 되는 계기에 특별히 유념하여야 할 문제가 있다. 일제 강점 기간 독립 투쟁을 중요한 사건과 인물별로 기억하고 기념하여왔다. 물론 역사에서 특별히 주목받는 주요 사건이나 이런 사건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인물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주요한 사건이나 주요 인물들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즉, 큰 사건이나 중요한 인물의 활동 이면에는 수많은 무명의 지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35년의 강점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저항 의식과 활동을 이어온 것이다. 수많은 민중의 드러나지 않은 독립 정신과 작지만 구체적인 행동들이 이어져 온 위에 때때로 특출한 운동과 사건이 있어 온 것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연면히 이어지는 산맥 위에 때때로 걸출한 봉우리가 솟아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인가. 새롭게 제정된 기념일을 경축하면서 이런 기념식을 가능하게 한 수많은 무명의 지사들을 기억하고 또 발굴해야 할 것이다.
    기고자 :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774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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