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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칼럼] 왜 재벌 총수는 대통령 앞에서 비굴해져야 하나

    박정훈 논설실장

    발행일 : 2021.06.11 / 여론/독자 A3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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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각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참으로 '한국적'이었다. 문 정부 들어 처음 열린 대통령과 4대 그룹 총수(삼성은 대리 참석) 간담회였다. 원탁을 앞에 두고 대통령과 총수들이 둘러서 있다. 대통령은 손 제스처를 써가며 무언가 말하고 총수들은 듣고 있다. 총수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모았다. 마치 선생에게 훈시 듣는 학생들 같다. 권력과 기업 간에 일상화된 갑·을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민주국가 치고 이런 광경은 지구상에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적'이다.

    간담회가 열린 경위부터 한국적이었다. 세상에 어떤 대통령이 자기 나라 기업인 만나기를 꺼리겠는가. 그러나 문 대통령은 이날까지 4대 그룹 총수만 따로 만난 일이 없었다. 대기업에 적개심을 감추지 않던 정권이었다. 큰 기업일수록 찍어 누른다는 '적대적 견제'가 문 정권의 기본 스탠스였다. 4대 그룹이 주도하는 전경련은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 취임 후 첫 재계 상견례에 15대 그룹 총수를 부르면서 100위권에도 못 드는 오뚜기 회장을 끼워넣기도 했다. '작지만 착한' 오뚜기에서 배우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의도된 모욕 주기였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미국에 다녀온 뒤 돌변했다. 미국에 가보니 재벌의 가치가 실감 났기 때문일 것이다. 반도체·배터리·5G 등의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는 대기업은 한국의 전략 무기다. 미국을 상대로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 카드가 대기업의 경쟁력이었다. 한국 정부에 고압적인 바이든 행정부도 한국 기업의 투자엔 안달하며 매달렸다. 회견장에서 바이든이 삼성·현대차·SK·LG를 일일이 거명하는 걸 보고 문 대통령도 가만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총수들을 초대하긴 했는데 뼛속 깊은 '갑(甲)'의 본능까지 감출 순 없었다. 총수 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조회 수 130만을 기록한 '이재용의 활짝 웃음' 동영상이 있다. 2019년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화성 공장에서 문 대통령을 안내하는 장면을 편집한 것이다. 동영상에서 이 부회장은 연방 고개를 숙이며 대통령 뒤를 따른다. 얼굴엔 함박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코믹한 표정으로 문 대통령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자연스럽지가 않다. 일부러 웃는 억지 웃음, 과장된 겸손함임이 누구 눈에도 분명해 보인다. 동영상엔 '재벌 총수가 사회생활 참 잘한다'는 등의 댓글이 5000여 건이나 달렸다. 그중에서도 촌철살인은 '웃어야 산다'는 댓글이었다.

    당시 이 부회장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최순실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됐다 풀려나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판결이 뒤집히면 다시 감옥에 가야 했던 이 부회장으로선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웃어야 산다'였다. 얼굴론 웃지만 사실 처절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비굴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안간힘 썼지만 결국 재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문 정권 재벌 정책의 요체는 '군기 잡기'다. 반기업 규제로 겹겹이 옭아매고 때로는 공권력을 휘둘러 재벌을 다스렸다. 여럿 건드릴 필요도 없었다. 1등 하나만 때리면 다 알아서 길 테니까. 채찍질은 삼성에 집중됐다. 청와대가 이 부회장을 잡아넣으려 작심했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공개하고 카메라 불러 TV 생중계까지 했다. 온갖 혐의로 삼성과 이 부회장을 쉼 없이 몰아붙였다. 그걸 본 총수들이 얼어붙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총수들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정치는 4류"라며 천둥 같은 죽비를 날렸고, IMF 사태 때 김우중 회장은 관료들과 싸워가며 대통령에게 직언했다. 최종현 회장은 통화 정책에 정면 도전한 일화로 유명하다. 앞 세대 총수들은 기개가 있었다.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전체를 생각했고 시대에 대한 소명 의식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권력도 함부로 못 했다. 이건희나 정주영이었다면 아무리 서슬 퍼런 권력자 앞이라도 할 말은 다 했을 것이다. 3세, 4세로 내려가면서 총수들의 '그릇'이 작아지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8·15 특사로 석방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국익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설사 풀려나더라도 정권에 감읍할 일은 아니다. 권력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적 요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 절대 다수가 '이재용 석방'을 원하고 있다. 동정해서가 아닐 것이다. 국가 경제를 위해 이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국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지, 정권의 엄포가 아니다. 권력에 순응하는 처세술보다 경영자로서 유능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그의 진짜 위기다. 다른 총수들도 마찬가지다.
    기고자 : 박정훈 논설실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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