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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 맛집처럼 빈티지한 느낌이지만 여전히 말의 맛이 살아있는 의학용어가 '화병'이 아닌가 싶다. '화병이시네요'란 말 한마디에 공감과 위로를 느끼며 눈물 흘리는 분들도 종종 본다.

요즘 흔하게 사용되는 '번아웃'이 화병의 현대 버전이란 생각이 든다. 번아웃의 주된 현상은 무기력감과 자신감 결여이지만, 마음의 '화'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을 가장 큰 고민으로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엉뚱하게 들릴 수 있지만 화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협상'이다. '협상의 기회'를 놓친 결과가 화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돼서이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가 일을 잘한다며 입사 동기보다 업무를 더 맡겼는데 처음에는 인정 받는다는 생각에 좋았지만 결국 과도한 업무량에 질책까지 받으니 마음에서 울화가 치미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란 고민이 있을 수 있다. 대표적인 직장인 화병 사례다. 이 경우도 초기에 상사와 업무량에 대해 잘 협상했으면 울화가 쌓이지 않았을 수 있다.

'협상'은 학문적으로도 중요한 영역이고 관련된 책도 많다. 그렇지만 거창한 비즈니스가 아닌 일상의 삶에서 협상이란 단어는 좀 거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협상은 그 기술보다 먼저 일상에서 '협상의 기회'를 인지하고 적극 참여하여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타인에게 내가 공격적이거나 까칠하게 보일까 봐, 또는 협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관계 갈등이 두려워 협상의 기회를 회피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경우 대개 협상으로 좋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결여되어 있다. 계속 피하다 보면 마음에 울화가 쌓여 화병까지 이를 수도 있다.

'협상'이라고 하니 거창한 말 같지만, 화병에 이르지 않으려면 협상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내 의견을 내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좋은 결과에 이르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증가하는 부가적인 이득도 얻게 된다.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잘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는 흔한 착각을 '투명성의 환상'이라 한다. 실은 그렇지 않다. 이야기해야 알 수 있다.

부부 갈등으로 오는 분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나를 위해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행동 한 가지'를 생각해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권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과 대화가 없어 답답하다는 아내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맛집 투어를 다니자'고 협상해보라 권했다. 소용없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남편이 흔쾌히 받아들여 놀랐다고 한다. 협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결혼 생활이 재미없다는 등의 막연한 제안은 갈등만 키우고 구체적인 협상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기고자 :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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