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사람·단체 이름 다 가려 '암호 같은 판결문'

    권순완 기자

    발행일 : 2021.12.03 / 사회 A12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법원 "개인정보 보호" 명분… "해독 불가, 사실상 비공개"법조계

    '피고인은 EV경 제EW회 지방선거에서 O시장으로 당선돼 EX경부터 EY경까지 재직, 제FE회 지방선거에서 R도지사로 당선돼 FF경부터 현재까지 재직 중.'

    대법원 홈페이지에서 사건 당사자가 아닌 일반인 열람이 가능한 2019년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1심 판결문에는 이런 '암호문' 같은 내용이 곳곳에 등장한다. 법원이 '판결문 비(非)실명화'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이뤄지는 '비실명화 작업'의 결과, 이 전 지사 판결문에서 보듯이 각종 고유명사는 물론 연도까지 알파벳으로 처리되고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해독이 불가능한 문서가 된다.

    야권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 판결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대기업들에 수백억 원대 재단 출연금을 내라고 강요한 혐의가 유죄로 확정된 최서원(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은 물론, 그런 요구를 받고 돈을 낸 기업 이름도 가려져 있다. 일반인들이 접하는 박 전 대통령의 대법 확정 판결문에는 '박근혜'라는 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판결문의 비실명화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 헌법(109조)상 재판 결과는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법원이 '개인정보 보호'라는 명분으로 판결문을 '암호문'처럼 만든 뒤 일반에 공개하는 것에 대해 법조인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비판했다.

    현재 법원은 성명, 단체·법인의 명칭, 전후 내용상 사람이 특정될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지워서 제공한다. 예를 들어 지난 7월 불법 댓글 조작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받은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공개용 판결문엔 '김경수'란 이름 석 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 법조인은 "사건 번호를 모르면 사실상 찾기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비실명화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차호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의 범위를 '살아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 한정한다"며 "법원이 뚜렷한 법적 근거도 없이 단체 명칭까지 판결문에서 가리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판결문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법원이 '꼼수'를 부리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법원이 개인정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부 수준 미달의 판결문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 등 사법 선진국들은 판결문을 가능한 한 투명하게 공개한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지난 10월 발표한 '판결서 인터넷 열람·제공 제도 개선 제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연방 법원은 미확정 판결문을 비롯한 모든 판결문을 실명 그대로 제공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성범죄 사건이나 가사 사건 등 개인정보 보호가 강하게 요구되는 경우 가명(假名) 처리를 하는 정도다. 유럽 국가들은 일부 비실명화 처리를 하면서도 단체 명칭(프랑스)이나 이미 언론 등에 공개된 정보(독일)는 실명으로 공개한다.
    기고자 : 권순완 기자
    본문자수 : 1522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