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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복판, 황금연휴에도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이 있다. 취직을 준비 중인 서른 살 동갑내기 친구는 3년째 같은 5월을 맞고 있다. 취업 무대의 비(非)시즌이 길어질수록 자존심이 바닥을 친다. 그는 오늘도 주섬주섬 가방을 싸 독서실로 향했다. 한 집안의 귀한 자식인 그는 그러나 언더그라운드에 있고 마이너리거이며, 세상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

자존심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활력이다. 이게 빠져나가면 곧장 시들어버린다. 황금연휴를 하루 앞둔 4일 새벽, 부산의 한 취업준비생(25)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고 한다. 지난달 취업 포털 사이트 사람인이 취업준비생 763명을 대상으로 '취업 준비 중 잃은 것'에 대해 물었다. 자신감(64.4%)과 자존심(49%)이 가장 많았다. 인간관계(42.6%), 꿈(37.8%), 열정(36.6%) 등이 뒤를 이었다. '취업 준비 중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것'에도 자신감(35.4%)과 자존심(27.7%)이 상위권에 꼽혔다. 잇따른 실패가 이들에게서 의연함을 앗아가고 있다.

취준생들만 그런 건 아니다. 메이저리거 이대호는 최근 "자존심 상한다"는 얘기를 곧잘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MVP까지 따낸 그는 미국행을 택하면서 자존심을 많이 구겼다. 헐값에 마이너리그에 계약했고, 시즌 개막 직전에야 겨우 메이저리그 후보 선수로 등록을 마쳤다. 그는 "(선발 명단에서) 빠지면 화가 난다. 나도 치고 싶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팀에 필요한 선수가 출전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5일, 이대호는 역전 연타석 홈런을 쏘아 올렸다. 서른네 살 먹은 130㎏의 거구가 베이스를 돌아 홈을 밟을 때 가슴이 찡했다. 경기 직후 미국 언론은 "이대호가 드라마를 쓸 줄 안다"고 평했다.

물론, 이대호는 유명인이고 일반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연봉(45억원)을 받는다. 할머니가 시장 리어카에서 채소 팔아 번 돈으로 키웠다는 얘기도 먼 과거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가 매일 야구 방망이를 챙겨 운동장으로 나갔고, 지금도 그걸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겨진 자존심을 수천 번의 방망이질로 다시 폈다.

햇살로 넘쳐나는 5월, 100만명에 육박하는 전국의 취업준비생들이 오늘도 각자의 타석에서 스윙을 한다. 지금 그들의 타석엔 햇살이 들지 않는다. 때론 강속구, 때론 커브볼이다. 그러나 조만간 결정적 공 하나가 날아들 것이다. 그리고 승부를 뒤집는 한 방이 터져 나올 것이다. 기고자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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