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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담당 기자의 책장은 말 그대로 공간과의 전쟁이다. 매주 쏟아지는 책은 수백 권인데, 책장 크기는 뻔하니 그럴 수밖에. 이 싸움 와중에 14년째 책장을 버텨낸 책 한 권이 있다.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 2002년 12월 5일, 1판 1쇄 찍음, 민음사. 국내 예술가 30명이 각자 좋아하는 30명의 세계 예술가를 한 명씩 맡아 그들의 삶과 내면을 썼다. 시인 최승호는 조각가 자코메티를, 소설가 함정임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골랐다. 텍스트뿐만 아니라 이미지까지, 판형과 디자인까지 매혹적인 종이책의 수작(秀作)이다.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고희(古稀)라는 사적 기념일이 출간 계기였지만, 어떤 안식처에도 닻을 내리지 않고 현실과 예술의 가시밭길을 헤쳐나간 영혼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공적 의미도 작지 않았다.

내일(19일) 민음사가 창사 50주년을 맞는다. 그런데 조용하게, 아주 조용하게 맞이한다. 기자 간담회도, 기념식도 없다. 사실은 50주년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16일 보내온 이메일 보도 자료를 보고 "그렇구나" 했을 정도다. 지난 2월 50주년을 성대하게 치른 창비나 지난해 11월 파주에서 많은 이를 초청해 70주년 기념식을 연 현암사와는 대비되는 행보였다. 의아해서 전화해 보니 박상준 민음사 공동대표는 "(아버님인) 회장님 건강이 좋지 않아 조용히 치르기로 했다"면서 "성대한 기념식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

내실은 당연히 다져야 한다. 지난해 민음사 매출이 전년 대비 33.6%나 감소했다니 '경영 합리화'가 최우선 목표라는 말에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해도 민음사의 '조용한 50주년'은 아쉽다.

민음사는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에서 서른두 살 청년 박맹호가 소박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시인 고은과 문학평론가 김현이 번역한 '세계 시인선', 한수산과 이문열을 스타로 만든 '오늘의작가상', 김우창 유종호라는 당대의 평론가가 10년 가까이 책임 편집을 맡았던 계간 '세계의문학'을 잇달아 선보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출판사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으리으리한 기념식이나 마케팅을 하라는 주문이 아니다. 문학과 출판의 위상이 달라졌고 책에 대한 대중의 선망도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이후 예전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기존 장르나 산업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가.

결국 책의 위기는 좋은 책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닐까. '세계 시인선'을 다듬어 다시 낸다거나 '세계의문학' 후속 문예지를 펴낸다는 계획은 '민음사 50주년'으로서는 아무래도 아쉽다. 14년째 책장을 버티는 책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의 서문은 이렇게 끝이 난다. '물리적인 나이는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신적인 나이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

50주년 민음사가 우리의 영혼에 다시 새로운 창문을 내 주기를 희망한다. 기고자 : 어수웅
본문자수 : 146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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