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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선 주자 트럼프가 언론에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는 우리나라 대선의 허경영 취급을 받았다. 터무니없이 공중 부양과 같은 막말이나 하는 사람으로. 그러나 웬걸? 그는 마침내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떠올랐고, 이젠 그가 누리는 인기의 비결을 분석하느라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경쟁자인 민주당 힐러리보다 공화당 트럼프가 승리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며 각국은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아마도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국가가 될 듯싶다. 선거운동 과정의 발언이 우리의 아픈 곳에 소금을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북한 핵에 시달리는 한국이 왜 자위적 핵무장을 하지 않는가'라고 묻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동맹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비용을 왜 미국이 부담하는가'라고 유권자들을 자극한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온 국내 일부 좌파 세력은 손뼉 치며 환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을 마주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입장에서 이 상황은 요즘 말로 '장난이 아닌' 일이다. 자위적 핵무장을 금기로 삼으며 미국의 핵우산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승만 대통령이 물려준 한·미 동맹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물려준 자주국방은 어디로 가고 이 지경이 되었는가.

우리는 아마도 작년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가한 대가를 앞으로 톡톡히 치를 가능성이 높다. 그 참가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국이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는 지금 말로만 행해지고 있다.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를 두고 일본에 일촉즉발의 무력시위를 불사하던 중국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그 사이 일본은 미국과의 찰떡궁합을 더욱 강화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아베가 진주만을 답방하는 방식을 검토하며 두 나라는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뚜렷한 후속 대책이 보장되지 않는 유엔 안보리 결의만을 우리가 쳐다보는 사이 북한은 36년 만의 당 대회를 통해 김정은 체제를 안착시켰다. '외톨이 대관식'이라곤 하지만 김정은은 북한을 핵 보유 국가의 지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 핵을 용인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한국은 중국과 북한 주도의 동북아 질서에 외톨이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트럼프의 막말이 완전히 막말만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트럼프의 발언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왜 비용도 충분히 치르지 않는 동맹국을 위해 미국이 핵우산을 보장해야 하는가? 스스로 지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국가를 위해 미국이 희생해야 할 까닭이 있는가를 그는 대놓고 묻는다. 스스로 돕지 않으면 하늘도 돕지 않는데, 미국이야 더 말할 나위 없는 것 아닌가?

바야흐로 나라마다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지도자의 발언이 정치의 화두가 되고 있다. 치안이 불안한 필리핀에서는 "군경에 저항하는 범죄자를 현장에서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총알 아까우니 교수형 도입하자"는 막말 아닌 막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이 발언 역시 전혀 막말이 아니다. 필리핀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도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발언으로 정면 돌파에 성공했다. 사상 최고의 실업률을 마주해 경제 비상사태를 선포한 올랑드 대통령은 최근 노조를 상대로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했다. 과도한 정규직 보호에 따른 노동시장의 경직화가 청년 실업을 높이고 비정규직을 양산한다는 대통령의 주장이 노조에는 막말일 수 있지만 국민에게는 핵심을 찌르는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나라도 최근 정치권에 '막말' 파동이 없지 않았다. 작년 10월 국회에서 '○○○은 공산주의자'라 주장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발언이 막말이라는 비난을 샀다. 지난 3월 윤상현 의원도 'XXX 죽여버려'라는 발언으로 거센 막말 비난에 직면했다. 윤상현은 바로 사과했기에 그의 말은 실제 막말이 되었다. 그러나 고영주는 사과는커녕 야당 의원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답변을 이어 나갔다. 막말 논란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의 주장에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고 국민은 그걸 평가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싸우기 귀찮아서, 좋은 게 좋은 거라서, 괜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기 싫어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경우야말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우리의 핵심 정체성을 파괴하는 세력이 바라는 노림수다. 대한민국 수호의 핵심 쟁점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소신이야말로 결국에는 한국 정치의 화두가 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라고 예외일 순 없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기고자 : 류석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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