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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어간 지 3분도 안 돼 연속해서 재채기가 터졌다. 23일 오후 서울대 규장각 336호. 지금은 한국학연구원 김시덕(41) 교수의 연구실이지만 3년 전만 해도 고서(古書) 수리 보관실이었던, 말하자면 창고였다. 그 이전에는 심지어 계단 자리였다고 했다. 규장각 공간 부족 탓이었겠지만, 젊은 교수는 이를 축복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2013년 9월 임용된 이 신진 기예의 차별성은, 직접 일본 고문헌을 수집하고 해독하여 새로운 글을 쓰는 예외적 재능에 있으니까.

이틀 전인 21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는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를 주제로 한국18세기학회(회장 정병설) 학술대회가 열렸다. 김 교수의 이날 발표 제목은 '에도(도쿄) 시민의 쇼핑'. 와세다대학이 소장한 '에도 가이모노 히토리 안나이(江戶買物獨案內·1824)'를 중심 자료로 삼았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수많은 가게가 있는 에도에서 혼자 쇼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 흥미로운 제목이지만, 제목 위주로 파고들면 일본인에게나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책에 적힌 3000여 에도시대 상점 리스트에서 김 교수가 주목한 대상은 조선의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 쇠고기 환약(牛肉丸), 우황청심환, 인삼…. 김 교수는 자신의 예외적 재능을 활용했다. 일본 고문헌 관련 사이트를 뒤져 이 책에 등장하는 '조선명약 우육환(牛肉丸)' 당시 전단과 복용 설명서, 그리고 포장지까지 찾아내 구입했다. 당대의 일본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감(體感)하고 싶어서였다. 연구실 수집 자료 더미에서 예의 그 포장지를 꺼내들며, 김 교수는 먼지와 함께 웃었다.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고문헌 컬렉터로는 국내 으뜸을 자처하는 그는 고려대 일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국문학 자료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술했듯 그의 장점은 일본의 옛 사료를 직접 발굴해 읽고, 한국과 일본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선 시각과 문제 의식으로 소통하려는 데 있다. 일본에서 외국인 최초로 일본고전문학학술상(2011년)을 받은 그의 박사 논문 '이국정벌 전기의 세계'가 그렇고, 한국에 돌아와서 쓴 '히데요시의 대외전쟁' '교감 해설 징비록'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역시 마찬가지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2차 자료가 아닌 원(原)자료와 실물 문헌을 직접 찾아 일본어로 논문을 쓸 수 있다는 점은 우리 학계의 드문 장점"이라면서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젊은 학자"라고 했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르네상스인'의 관심을 끈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학제(學制)의 보수적 연구 관행을 넘어,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활발하게 넘나들려 시도한다는 점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통섭이지만, 자칫 문학에서도 역사에서도 비주류 취급을 받기 십상인 위태로운 도전이다. 그는 조심스레 이렇게 대답했다.

"역사학에서 '사료(史料)'와 '비사료'를 나누는 것이나, 문학에서 '문학적인 텍스트'와 '문학적이지 않은 텍스트'를 나누는 것이나,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전근대 사람들이 오늘날 연구자처럼 그렇게 텍스트를 나눠서 생각했을까."

그는 '무지개의 스펙트럼'이란 비유를 썼다. 어떤 문헌도 흑백논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빨강부터 보라까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진실을 갖고 있다는 것.

이런 관점이다 보니 그의 주된 관심은 매파보다는 비둘기파, 선명한 진영론자보다 자유주의자에 있다. 가령 조선과 일본 사이에 낀 쓰시마의 외교관이었지만 양국 지식 계급 모두에게서 찬밥 취급을 받았던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 지금은 무능한 인물로 먼저 기억되는 독일 출신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1848~1901), 일본의 힘을 빌려서 독립을 달성하려 한 내몽골의 왕 바부쟈브….

말은 멋있지만 현실에서 역사는 매파가 주도하기 십상이고, 진영에 끼지 못한 자유주의자는 외롭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왜, 라고 물었을 때 김 교수는 예의 '무지개의 스펙트럼'을 다시 꺼냈다.

"세상에는 서로 대립하는 두 견해가 있다. 극좌와 극우, 극단적으로 말하면 '빨갱이'와 '친일파'. 하지만 진실은 그 두 극단의 중간 어딘가이지 않을까. 그게 세상이고, 나는 그 세상을 대표·대변·상징하는 비둘기파의 목소리에 귀가 기울여진다."

지금 그는 조선일보에 북칼럼 '종횡무진 인문학'을, 경향신문에는 '한국이 모르는 일본'을 동시에 연재하고 있다. 일본어로 써서 그 나라 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던 '이국정벌 전기의 세계'는 오는 8월 '일본의 대외전쟁'(열린책들)이란 제목으로 출간된다. 빨강과 보라 사이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재채기가 잠시 멈췄다.

기사 전문=chosun.com 기고자 : 어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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