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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출처 조사·세금 폭탄 피할 목적, 계약금 등 135억 이미 송금
일부 대금은 쪼개기 밀반출도… 고액투자자 15명은 검찰에 송치

말레이시아에서 분양 대행사를 운영하는 A씨(40)는 지난 2016년 말부터 서울과 부산의 유명 호텔을 돌며 부동산 투자설명회를 열었다. 말레이시아 남부의 대형 신도시 조호바루에 건설 중인 상가와 콘도, 주택 등을 분양받으면 향후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5년간 주택 가격이 50% 오를 만큼 부동산 열풍이 뜨거웠다.

설명회에 몰려든 의사, 회계사, 중견기업 대표, 대기업 임원 등 고액 자산가들의 귀가 솔깃해질 만한 내용이었지만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은행을 통해 정상적으로 해외 부동산 투자 대금을 송금했다간 자금 출처를 조사받거나 세금 폭탄을 맞을 우려가 있었다. A씨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자산가들이 A씨 일당이 갖고 있는 국내 계좌에 원화를 입금하면 A씨가 말레이시아 현지 은행에서 링깃화로 출금해 대금을 지불하는 환치기 수법을 쓴 것이다.

또 외화를 잘게 쪼개서 밀반출하는 등 불법적인 방법을 통하면 당국에 들키지 않고 돈을 송금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말을 듣고 고액 자산가들이 앞다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한 채에 16억~19억원 하는 상가 건물 42채를 30명이 사들였다. 1억7000만~4억2000만원짜리 콘도는 60명에게 69채가 팔렸다.

40대 재활병원장인 B씨는 16억원짜리 상가 건물 두 채와 3억5000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를 구매한 뒤 A씨가 알려준 대로 3억7000만원을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환치기 계좌로 송금했다. 대기업 임원 C씨는 상가 건물과 아파트 두 채 등 총 2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현지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사들였다. 이어 계약금 1억6000만원은 환치기 계좌로 입금하고, 나머지 4000만원은 직접 밀반출해 전달했다.

환치기 과정에는 말레이시아 건설 현장에 파견 근무 중인 국내 건설사 D부장도 가담했다. D부장이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근무 중인 한국인 파견 노무자들의 급여 계좌를 투자자들에게 알려주면 투자자들은 부동산 투자금을 이 계좌로 입금했다. 그러면 D씨가 같은 금액을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링깃화로 A씨에게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말레이시아 부동산에 투자해온 고액 자산가 146명이 21일 서울세관에 무더기로 적발됐다. 이들이 계약한 말레이시아 부동산 취득 가액은 1000억원에 이르고, 계약금과 중도금 명목으로 실제 송금한 금액도 135억원이 넘는다고 서울세관은 밝혔다. 서울세관은 분양 대행업자 A씨와 D부장, 10억원 이상 고액 투자자 15명을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하고, 나머지 소액 투자자에 대해서는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서울세관 관계자는 "동남아 주택 가격 상승세를 타고 일부 부유층이 동남아로 부동산 투어를 다니며 고급 주택을 사들인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조사를 벌인 끝에 적발하게 됐다"며 "최근 해외 부동산 투자가 늘고 있어 유사한 사례가 더 있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업계에선 국내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이들이 해외 부동산 투자에 몰리면서 이런 불법 행위가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거주자들이 해외 부동산 취득을 위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외로 송금한 금액은 총 6억2550만달러(약 7500억원)로 5년 전 1억8100만달러보다 세 배 이상 늘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별 해외 부동산 투자 비중은 미국(32%)이 가장 많고 이어 말레이시아(25%), 베트남(22%), 캐나다(8%), 필리핀(6%), 태국(5%) 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