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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승 고지 밟은 최규병 9단

최규병(59) 9단이 걸어온 길엔 드라마 같은 장치가 도처에 깔려 있다. 한국 최고 바둑 가문서 태어나 초등학생 때 입단했고, 12년간 방황기를 거치고도 타이틀 무대를 넘나들었다. 몇 년 전부터 시니어 대회를 평정하더니 지난주엔 통산 1000승(741패 3무) 고지에 발자국을 찍었다. 1000계단은 개인적 애환과 시대 상황 등 다양한 사연의 축적이다.

최규병을 바둑의 길로 이끈 외조부(고 조남석옹)는 한국 바둑 개척자 조남철의 친형이다. 그는 조상연 조치훈 두 아들을 프로 기사로 만든 것으로 부족해 최규병과 이성재(현 9단) 두 외손자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최규병은 가세가 기울면서 열 살 무렵부터 입단할 때까지 외갓집에서 지냈다.

"초등학교 졸업 전 입단이 지상 목표였다. 하루 16~17시간씩 공부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외조부가 구해다 준 신문 기보 쪼가리와 일본 서적이 교재의 전부였다. 충암초 6학년 때 프로의 꿈을 이뤘다. 12세 5개월 입단은 조훈현에 이은 역대 최연소 2위에 해당했다.

하지만 중학교 배정 추첨이 최규병의 인생 설계에 치명타를 안겼다. 바둑 특기생 제도가 있는 충암중을 지원했지만 다른 중학에 가야만 했다. 그 차이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났다. 한창 물이 올랐던 최규병은 좌절감에 빠져 바둑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대국 자료를 보면 1975~81년엔 매년 10판 정도만 두는 데 그쳤다. 고3이던 81년엔 1전 1패로 승률 0% 기록까지 남겼다. 대학생이 된 82년부터 대국 수가 연간 30판 정도로 늘어났다. "오랜 공백으로 바둑이 낯설었지만 푼돈이라도 벌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동생들 끼니를 걱정할 만큼 절박했다."

87년 제대하면서 번민에 빠졌다. 취직할 것인가, 그래도 바둑의 길을 가야 하나. 바둑이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른들 의견도 갈렸다. 조남철 선생은 "한창 나이 12년 공백으론 성공 못 한다"며 아마 전향을 제안했고, 아버지도 취직을 권했다. 외조부만 "힘들게 프로가 됐는데 그럴 순 없다"고 반대했다.

이 무렵 충암 바둑부가 새로 단장하면서 최규병에게 연구실 관리를 맡겼다. 어린 영재들과 어울리다 보니 승부 본능이 다시 솟구쳤다. "나이는 허울이며 중요한 건 열정"이란 동갑내기 친구 양재호 9단의 진지한 충고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공부하다 바둑판 앞에 쓰러지고, 깨면 그 자세로 다시 공부하는 식이었다. 세 살 밑 유창혁이 자신의 비기(?技)를 아낌없이 전수하며 재기를 도왔다. 최규병은 복귀 첫해인 88년 32승 17패(65.3%)를 시작으로 7할 안팎 승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후 최규병은 도무지 '12년 방황'을 겪은 사람 같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94년 박카스배서 준우승, 99년 맥심배에서 우승했다. 두 대회 모두 결승 상대는 최규병이 '스승'으로 부르는 유창혁이었다. 그는 최근에도 대주배 우승, 시니어리그 MVP 등 여전히 괴력을 뿜어내고 있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AI를 끼고 살며 하루 4시간씩 공부하는 성실함이 비결이다.

"바둑은 내게 놀이로 시작해 꼭 이뤄야 할 의무로, 지나간 추억으로 변모를 거듭하다 호구지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부터는 바둑의 참맛을 깨닫는 과정이 됐으면 좋겠다." 최규병은 혼란과 좌절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준 힘은 헝그리 정신이었다며, 2000판 돌파를 1000승 다음 목표로 제시했다. 기고자 :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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