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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옛날에 만났던 어르신들 연락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장난감 선물 받았던 기억이야 선했지만, 정작 전화번호나 주소는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노란색 수첩에 적어뒀었는데, 이제는 그 수첩이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친구 전화번호 하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휴대폰 주소록에 저장해놨을 뿐이다.

'인간의 기억력에 한계가 있으니 잊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으냐'라고 말하자니, 옛날에 교수님들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국전쟁 시기, 피란민들이 물밀듯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다. 허술한 천막 아래 임시 대학교가 만들어졌다. 교수님도 있고 학생들도 모여들고, 그리고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책이 없었다. 피란길에 누가 책을 가져올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한국사와 중국사에서 큰 연구 업적을 남겼고 학술원 회원을 지낸 고(故) 김상기 서울대 교수님은 당시 '후한서' 본문을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통에 제대로 된 종이도 없었지만 갱지니 파지니 모아다가 교재를 하나하나 손으로 써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렇게 손으로 쓴 교재를 함께 읽으며 공부를 시작했다. 전선에서 총알과 대포알이 날아다니는 와중에도 천막 아래에서 손으로 쓴 후한서 고문을 강독하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당시 이 말을 듣고 정말로 놀랐다. '어떻게 120권이나 되는 후한서를 다 외울 수 있지?' 하고 경이로워했지만 나이 들어 생각해보면 더욱 대단해진다. 어떻게 전쟁 속에서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내일 세상의 멸망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지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미 여든이 넘으신 이모님께서는 전쟁 때 너무나도 배가 고파 돼지 먹이였던 오이의 속을 주워 먹었던 기억을 이야기해주시곤 한다. 그 당시 선배님들이라 해도 처지는 다르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손으로 쓴 교재를 나눠 보며 고전을 읽었던 선배들을 나는 영영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과연 내 수첩은 어디에 있을까. 전화번호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그 많은 어른들께 연락을 드려야 하나 고민이다. 기고자 : 이한 작가·'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저자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05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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